신명기 8장 1-10절
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10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여러분께 있어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본받고 싶은 분은 누구십니까? 역사적으로 많은 위인들이 있겠지만, 예수님을 알고 따르는 저와 여러분은 이 질문에 당연히 ‘예수님’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내 자녀도 예수님처럼 살게 하고 싶다고, 마찬가지로 고백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여러분의 자녀를 우리가 그렇게도 존경하고 따르는 예수님처럼 살게 하고 싶습니까?
제가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다시 질문 드려 보겠습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였는데,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예수님처럼 집이 없이 살아도 괜찮으십니까? 예수님처럼 빌라도 같은 사람에게 심문을 받으며 끔찍한 고난을 받는 일이 있어도 괜찮으십니까? 예수님처럼 많은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목숨을 거두게 된다해도 괜찮으십니까?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우리가, 아니 우리 자녀들이 이런 고난을 받는다면, 과연 예수님 믿고 교회에 다니라고 하겠습니까? 인간의 마음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빼고 부활과 영광에 동참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인간의 마음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모두 사도 바울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바울처럼 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주님을 위해 결혼도 하지 않고, 사도 바울처럼 주님을 위해 모든 명예를 포기하고, 사도 바울처럼 주님을 위해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가기도 하고 갖가지 위협을 당하는 삶을 원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자신의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반드시 광야와 같은 시간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가는 길에는 반드시 광야 학교에서 훈련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원하지 않던 ‘질병’이라는 광야, 때로는 상상하지 못한 ‘사고’라는 광야, 때로는 끝없이 번창될 것 같은 사업이 어느 날 갑자기 부도를 당하는 ‘파산’이라는 광야, ‘실패’라는 광야, ‘이별’이라는 광야, ‘슬픔’이라는 광야,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이라는 광야를 건너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 내가 이런 고난을 당해야만 합니까?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기에 이런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까?”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40년 동안 광야길을 걸어갑니다. 때로는 적들의 공격을 받습니다. 물이 없습니다. 편안히 잘 곳이 없습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왜 이 길을 40년 동안 걸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광야길을 걸어야 하는가? 하나님은 그 이유를 오늘 말씀을 통해 세 가지로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오늘은 우리가 광야길을 걸어야하는 이유 세 가지를 함께 묵상하기 원합니다.
1. 하나님은 광야길을 통하여 우리를 낮추시기 원하십니다.
본문 2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다른 말로하면 겸손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주제를 파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자신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 세상이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을 구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것이 잘되면 사람은 끝없이 교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교만이야 말로 인간의 최고의 문제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습니다. 교만해지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 몰입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꽤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잘 났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스스로 운명을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당하면, 그 때 자신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아, 내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없구나! 인생이란 내 힘으로 살 수 없는 거구나! 나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이구나!”
이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광야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자신이 너무나 부족한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지 인정하지 못합니다. 인간이란 등 따시고 배부르고 모든 것이 편안할 때는 자기의 실력을 믿고 교만해 하지만, 심한 환난이 다가와서 때리면 그 교만이 금방 박살나고 ‘자기’ 라는 우상이 산산조각 깨져버리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존재입니다. 이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동물이 병들었다고 해서 ‘아, 나는 연약한 존재구나’ 라고 깨닫고 겸손해집니까? 어떤 동물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말합니까? 그러나 인간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오직 고난을 통하여 자신과 하나님을 제대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고난의 강을 건너고 광야를 길을 통과한 사람은 사도 바울처럼 “내가 죄인 중의 괴수로구나!”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의 죽음을 보면서 인간의 허무를 느끼게 되고 “인생이란 별거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업의 실패를 통해 “나의 욕심대로 모든 것을 채울 줄 알았는데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구나!”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본문 3절은 어떻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낮추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먹을 것이 풍부하고 건강해지면 어떻게 됩니까? 풍부한 만큼 사람은 교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뒤에 나오는)
신8:12-14
12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잊지 않고 더욱 낮아져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져야할지 알게 하고, 하나님이 날마다 부어주시는 은혜를 담는 그릇으로 살게 하십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로 광야길을 걷게 하시는 두 번째 이유는, 믿음과 순종의 훈련을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2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신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부모들은 왜 학교 가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냅니까? 그것은 이 아이가 나중에 커서 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들지만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때로는 우리를 광야라는 학교에 집어넣고 우리가 고통스럽고 힘들어 한다는 것을 다 아시면서도 훈련시키십니다. 광야 학교를 통하여 세상적인 인생관, 잘못된 습관들, 세상 속에서 때 묻은 철학과 문화들을 깨끗이 청소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여 믿음과 순종의 훈련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는 훈련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순종의 훈련을 어떻게 받았냐면, 25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방랑하며 그 훈련들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30여 년을 광야에서,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시내 광야에서 40년을, 다윗은 17여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며 혹독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3년 반 동안 아라비아 사막에서 외로운 광야 훈련을 받았습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입을 것이 없습니다. 홍해가 앞에 있습니다. 적들이 있습니다. 거할 집이 없습니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저 전폭적으로 하나님 믿고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보십시오. 군사력이 있습니까? 탁월한 전략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크신 팔로 들어 통과케 하신 것입니다(출15:16). 그들의 진로를 가로막는 여러 나라를 거뜬히 통과케 하셨습니다(신9:16). 바다를 육지처럼 통과하게 하셨고(느 9:11), 강을 도보로 통과하게 하셨으며(시66:6), 그 어떤 악천후 속에서도 사막을 대로처럼 통과케 하여주셨습니다(시136:14,16).
비행기나 화물선이 식량을 공급해준 것이 아닙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먹여주셨습니다. 신명기 2장 7절을 보면, 하늘에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부족함이 없이 먹여주셨고(출 16:8), 땅에서는 바위를 터뜨려 물을 마시게 하셨습니다(사 48:21). 본문 4절을 보면, 광야 40년 동안 항상 새 옷과 새 신발까지도 공급해주셨습니다. 모자라지도 않았고, 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신명기 8장 18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에게 재물 얻을 힘을 주셨다”고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당하는 고난이 겉모습을 보면 비슷하지만 그 원인을 살펴보면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고난은 수치스러운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고난은 영광스러운 고난이 있습니다. 전혀 부끄럽지 않은 고난입니다. 똑같이 다리를 절어도 도둑질 하다가 다쳐서 다리를 절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왜 다리를 저느냐 누가 물으면 왜 다쳤는지 말 못 합니다. 그러나 용감하게 전쟁에 나가 상의 군인이 되었다면 그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은 대강 4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1) 첫째는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먼저는 자신의 죄, 자신의 잘못, 자신의 부주의 때문에 징계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아간은 범죄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거짓말하다가 부부가 동시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런 고난은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그의 후손들이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입에도 담기 싫어할 것입니다.
자신의 죄는 아니지만 타인의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술 취한 운전자의 차가 와서 받는 것이나 환경오염으로 질병에 걸리는 것 등은 타인의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2) 둘째는 자연적인 고난입니다.
늙으면 자연적으로 기력이 쇠하고 질병이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불편한 것들이 다가옵니다. 자연적인 것입니다.(천재지변)이런 고난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닙니다.
3) 셋째는 훈련으로 다가오는 고난입니다.
요셉이나 욥과 같은 경우입니다. 하나님이 더 귀한 인물로 쓰시기 위하여 훈련을 시키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부끄러워할 고난이 아닙니다.
4) 마지막으로 넷째는 사명 때문에 스스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스데반이나 예레미야, 에스겔, 모세, 다니엘과 같은 경우입니다. 편하게 살려면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고난의 길, 순교의 길을 자처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더더욱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정말 자랑스러운 고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어떤 고난이든 그 훈련의 과정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것이 있는데, 사람의 인생에 있어 참으로 행복하고 성공적으로 사는 길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 무수한 고난의 강을 건넜던 다윗은 시편 119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119: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119: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말씀을 듣는 것과 순종하는 것은 별개의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다고 다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담 이후 사람은 참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를 선천적으로 싫어합니다.
성경의 요나를 보십시오. 니느웨로 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길 싫습니다. 결국 폭풍을 만나고 바닷물에 빠지고 죽음의 고통을 맛본 후에야 어쩔 수 없이 순종을 합니다.
순종의 훈련에서 우리는 합격해야 합니다. 억지 부릴 필요 없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말씀에 순종하면 광야길은 순조롭게 건너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소 무거운 짐을 주신 것 같으나, 그 짐을 감당할 수 있는 어깨도 주셨던 것입니다. 시련을 허락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통과케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 우리로 광야길을 걷게 하시는 세 번째 이유는, 결국 우리에게 복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7-10절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10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신8: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광야길을 걷게 하시는 이유는 결국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광야길을 통과하게 하는 것은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괴로움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의사가 병든 사람들을 그 쓰라린 고통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수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잠시 고통이 있더라도 질병에서 고침 받아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수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진짜 생명을 찾아가는 축복의 장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홍해를 가르는 기적,
물이 없을 때 쓴물을 단물로 바꾼 기적,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먹고 사는 기적,
아말렉 군대와 싸움에서 기도로 승리하게 한 기적,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기적,
이 모든 기적들이 광야가 아니면 어떻게 볼 수 있고 어떻게 체험할 수 있었겠습니까? 광야라는 곳에 하나님은 보물 숨겨 놓고 맛보도록 했습니다. 광야는 우리에게 고통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울 지라도 축복의 장소인 것입니다.
광야 40년이 없는 모세, 25년의 고뇌의 세월이 없는 아브라함, 감옥 생활이 없는 요셉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없었다면 그들은 진정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기에는 부족했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베드로 사도는 고난 받는 것을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벧전3: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하나님은 광야로 보내지만 그 광야에서 이길 힘을 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힘을 어떻게 깨닫고 활용하느냐 입니다.
고난이 복된 것을 아는 사람들의 인생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후11:23-27(현대인의 성경)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나를 정신병자로 보겠지만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그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며 여러 번 갇혔고 매도 수없이 맞았으며 죽을 고비도 여러 번 겪었습니다.
24 나는 유대인들에게 39대의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25 또 세 번이나 몽둥이로 맞았고 한 번은 돌에 맞았으며 세 번이나 파선하였고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헤맨 일도 있었습니다.
26 나는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들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신자들의 위험을 당했습니다.
27 또 수고하고 애쓰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적도 여러 번이었고 주리고 목마르며 수없이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까? 지긋지긋하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롬5:2-4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심지어는 그 고난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골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뿐만 아니라, 아들처럼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딤후1:8). 고난도 받으면 나로 족하지 아들에게까지 고난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고난을 받았지만 너희들만큼은 편안하게 살아가기 원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달랐습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진정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신앙인들의 삶은 달랐습니다.
1950년 8월 어느 주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평안북도 풍천에 있던 한 교회에서 온 마음으로 주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던 중에 공산당원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이 교회는 탄약창고로 징발되었으니 당장 나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의 담임목사였던 박영근 목사님은 그들의 요구를 완강히 거부하고 다시 말씀을 전하려고 했고, 결국 그들에게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새끼줄에 묶여 끌려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던 아들이 소리쳤습니다.
“아무리 전쟁통이라 하지만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를 강단에서 끌어내려 중죄인 잡아가듯 체포해가는 것은 불법이요!”
그러자 공산당원들은 아들마저 함께 묶어 끌고 갔습니다.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면서도 박영근 목사님은 공산당원들에게 “예수를 믿으시오 그것만이 사는 길입니다”하며 전도를 했고, 무참하게 끌려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아들은 엉엉 울었다.
포승줄에 묶여 뒤따라 끌려오면서 울고 있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울지 마라, 아들아. 순교는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내리시는 은총이란다. 초대교회 제자들 대개가 순교한 것은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 때문이란다. 우리들의 존경하는 앞서간 많은 순교자들도 일본 헌병들에게 가죽 채찍으로 형언할 수 없는 악형을 받으며 순교하지 않았느냐? 주님 위해 죽는 것은 은혜 받은 자만이 받아 누리는 영광인 것이다. 감사하자.”
두 부자는 이렇게 공산당원들에게 철산 앞 강변으로 끌려가서 한날 한시에 순교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제발 우리 아들만은 살려달라.”가 아니라, 너 또한 이 고난을 감당하라고 권면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이 땅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았습니다. 이 땅 위에서의 잠시잠깐 살다가는 인생이 아니라 영원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영원한 삶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십자가를 피한다면 이미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아니다. 그대가 밖으로 도망쳐도 거기 십자가가 있고, 안으로 숨어도 거기 십자가를 볼 것이다. 위로 올라가도 십자가가 기다리고, 밑으로 파고 들어도 십자가가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16:24, 막8:3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베드로 또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벧전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주님과 함께하는 고난의 끝은 결국 축복입니다. 이 고난의 과정을 부끄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고난은 손해가 아니라 거룩한 투자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의 십자가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 줄 믿습니다. 피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능히 감당케 하시는 하나님을 묵묵히 바라보아야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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