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8장 43-48절
43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44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47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이 땅 위에서 사역하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실 때가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했고, 예수님을 통해 일어나는 온갖 기적들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항상 몰려 다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밀고 예수님을 만졌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만지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간절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그 여인만이 그곳에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진 사람이라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엄청난 군중에 왔다가 떠나갔지만 그들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습니다. 반면, 예수님을 실제적으로 만지고 경험한 한 여인의 놀라운 이야기에 대해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이 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 갑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실제로 주님을 만졌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생각해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와서 습관적인 예배를 드리고 돌아갑니다. 어쩌면 교회에 나왔는지 이유를 제대로 말하기 힘들 정도로 습관적인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냥 참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번 반복되어 익숙해진 예배를 편안하게 여깁니다. 오늘도 별일 없이 예배시간이 잘 지나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다보니 설교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만족합니다. 함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흥밋거리를 찾아다니고 자신의 유쾌한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아다니기에 바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서 누구보다 예배도 열심히 드리고 기도도 열심히 드리고 섬기는 것도 더욱 열심히 섬깁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이 맡은 직분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책임감도 강합니다.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사역을 위해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물론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자신을 낮추거나 사역을 방해하면 돌변합니다. 이제껏 그들이 섬겨왔던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자신의 왕국이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두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할 때,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의 교회에서 흔하게 존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정말 좋은 교회이지만, 상대적으로 이런 분들이 적다는 것이지 안타깝지만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가장 큰 공통점이 있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별로 대단한 관심거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저명한 신학자 팀 켈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예리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 사람들에게는 지적으로 자극이 되는 신앙과 감정적으로 만족을 주는 신앙, 사회적으로 구원하는 신앙이 있다. 우리는 모두 그것을 원한다. 지적으로 자극을 받기 원하고, 감정적으로 몰입하기 원하고, 사회적으로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원한다. 그런데 지적인 자극을 원하고, 감정적인 만족을 원하고, 사회적인 유용성을 원하면서도 하나님을 원하지 않을 수 있다. (중략) 당신의 삶 속에 정말로 하나님이 계신다면 당신 자신의 뜻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실제로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섬기려 하는 사람의 차이를 보여준다.」
교회에 와도 예수님을 간절히 찾는 것은 그들의 관심거리가 아닙니다. 예배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기대 없이 교회에 왔다가 아무런 미련 없이 돌아갑니다. 그들은 교회를 계속해서 왔다갔다 합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그렇게 왔다갔다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밀지만 만지지는 못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말씀은 듣지만 그 말씀이 심령에 미처 새겨지기도 전에 일어나 버립니다. 기도는 하지만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기도 전에 일어나 버립니다.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참된 생명과 사랑을 가만히 누리고 있지를 못합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스케줄 때문에 바쁘고, 어떤 이는 자신의 소원을 주님께 관철시키기 바쁘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사역 때문에 바쁩니다. 자신이 진실로 주님과 접촉되었다 느껴질 때까지 느긋한 마음으로 주님을 추구하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은 것입니다.
기독교의 예배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재해 계시는 주님을 실제로 접촉하고 경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됩니다. 그냥 설교 한 편 듣고 시간을 보내거나 습관적인 기도로 시간을 보내는 예배는 생명이나 능력이 전혀 없는 ‘죽은 행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통해 주님과 접촉하는 것을 목표로 두고 힘써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처럼 주님을 만지는 예배를 드려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은 본문에 나오는 이 '주님을 만진 여인'을 모범으로 삼아 몇 가지 내용을 묵상해보려 합니다.
1. 주님을 만진 여인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뚫고 나아갔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기까지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마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엄청난 군중이 예수님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건강한 남자도 그 인파를 뚫고서 예수님 가까이로 나아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질병을 앓다 보니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자리를 깔고 누워서 지내는 편이 더 많을 정도로 기력을 잃은 상태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 안에는 예수님을 옷자락이라도 잡아야겠다는 소원이 너무 강렬했기에 수십 번 수백 번도 거칠게 떠밀리고 긁히는 것을 감당하면서까지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지 알 수 없지만 끝내 여인은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나아갔던 것입니다.
누구나 예수님께 나아갈 수는 있지만 예수님을 직접 만지고 경험할 수 있을 정도로 다가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절대 아닐 것입니다.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기도를 통해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고백하는 것 절대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려고 노력할 때마다 방해들이 있습니다. 홀로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거나 전화를 할 것입니다. 자녀들이 여러분이 조용히 홀로 있도록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릴 때에 조차도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주의를 분산시키는 일을 해서 도무지 예배에 집중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앞일을 걱정하다 돌아올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정신적으로 육신적으로 지쳐서 주님께 집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싸워야 할 줄 믿습니다! 기도시간을 허비하거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처럼 온갖 약점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붙들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결심을 하고 최선의 노력을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아가지 못할 때는, 그때는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눅19:2-5]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성경에 나타나는 삭개오의 모습은 첫째로 키가 작은 사람, 둘째로 세금을 거두는 세관원 중에서 고급관료였던 세리장이라는 것, 세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환영받거나 존경받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식민지를 수탈하는 일에 현지인을 고용했습니다. 왜냐하면 동족이 동족을 수탈해서 로마로 상납하도록 만듦으로써 로마에 대한 반감을 줄이고, 또 그 반감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로마는 현지주민을 세관원으로 고용했던 겁니다. 그래서 동족을 수탈하는 세리라는 직업은 몸을 파는 직업이나 도둑, 혹은 살인자와 같은 수준으로 취급되는 혐오직종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라면,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다면 적어도 세리는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왜 세리가 되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힌트로 성경은 ‘그의 키가 작았다’고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2000년 전에 직업이라 하면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고, 짐을 옮기는 것, 힘을 사용하는 노동직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남보다 작은 키에 왜소한 몸매를 가진 사람은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요? 그리고 그 사람이 할 수 있었던 것이 뭐였을까요? 더구나 계급과 식민지 주민으로서의 한계를 넘을 수 없는 작고 왜소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뭐였을까요? 지배층과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개로 사는 것 외에는 없었던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마을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하지만 몰려든 인파로 인해 삭개오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작은 키, 외소한 몸이 또 다시 그의 인생에 걸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갑자기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무 위 매달린 채로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아무도 관심이 없고, 누구도 불러주지 않던 그의 이름을 아시고 ‘삭개오야’하고 다정하게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나무 위라도 올라가고자 하는 심정을 가지고 실제로 그렇게 행할 때에 예수님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먼 곳을 수고스럽게 돌아간다고 해도, 또 어떨 땐 맨바닥에 온몸을 대고 엎드려 기어가야 한다고 해도, 그 수고를 마다하지 않겠다고 고백하는 사람에 주님은 함께 하여 주십니다.
그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도 이런 삭개오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 나도 주님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도 나무에 오르는 수고와 노력을 실제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원한다면서도 나의 자존심에 조금이라도 금이 가는 일이 있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멈춰섭니다. 조금만 저항이 와도 ‘주님이 원하신다면 이렇게 어렵지 않을 텐데. 주님은 나를 별로 만나고 싶지 않으신가 봐.’ 라고 단정하며 올라가던 나무에서 다시 내려옵니다.
내가 정말로 주님을 원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았던 여인처럼 멈추지 않고 주님을 향해 파고들어야 합니다. 그분의 옷자락이 내 손에 잡힐 때까지 계속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삭개오처럼 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어 올라가야 합니다. 그분이 내 이름을 불러주실 때까지 계속해서 기어 올라가야 합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 잡혀주시고, 그때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실 것입니다.
2. 주님을 만진 여인은 자신이 무가치하게 느껴져도 나아갔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가치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 예수님과 접촉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과 접촉할 때 어떤 갑작스러운 심판을 받지 않으면 좋을 텐데…'
그녀는 질병 때문에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을 권리가 없었습니다. 레위기의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집안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때로는 저와 여러분도 자신이 너무 무가치하게 여겨져서 ‘내가 과연 주님의 옷자락을 만질 자격조차 있는 사람인가?’ 고민할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스스로를 초라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지 못했던 최근의 나날들과,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감정상태를 감안하면 ‘나같이 무가치한 죄인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과연 나 같은 사람에게도 부어질 은혜가 있을까? 예수님이 나 같은 사람에게도 관심을 가지실까?’
앞서 말씀드렸던 삭개오의 마음에도 분명 이러한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세리인데, 예수님도 나를 싫어하시지 않을까?’
삭개오를 보며 수군거리는 사람, 멸시하는 사람, 그를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가로막으며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나는 이런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며 삭개오를 따뜻하게 품어 주셨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해방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을 믿고 나섰을 때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왕자의 삶에서 살인자, 도망자 신세로 추락했고, 자신의 실수 때문에 모든 것을 그르쳤다고 절망에 빠져 40년을 광야에서 보내었습니다. 출애굽기 3장과 4장에는 자존감이 완전히 무너져내린 모세를 다시 쓰시기 위해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도 모세는 반복해서 거절합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말도 잘 못합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모세를 일으켜 세워 그의 부르심을 성취시키셨습니다.
신약의 마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잡히던 날 밤에 군병들에게 잡히자 옷을 벗어놓고 도망쳤던 겁쟁이였습니다. 삼촌 바나바와 함께 전도여행에 따라 나섰지만 너무 힘들어서 도중에 포기하고 맙니다. 그 다음 전도여행을 위해 팀을 꾸릴 때 마가를 팀에 넣어 데리고 갈 것인지 말 것인지 때문에 위대한 두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갈등하기까지 합니다. 자신의 집에서 오순절 역사를 경험하기도 하고 삼촌 바나바의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자신의 나약함을 넘어서지 못해 절망했을 이 못난 젊은이는 훗날 사복음서 중 가장 먼저 쓰여졌다고 알려져있는 마가복음을 기록하는 귀한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나같은 사람에게도 부어질 은혜가 있을까? 예수님이 나 같은 사람에게도 관심을 가지실까?’
주님은 언제나 “Yes!”라고 답하십니다.
주님과 접촉할 때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무가치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더라도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다가갈 수 없다는 느낌이 들지라도 더욱 진지하게 갈망해야 합니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느낌 때문에 오히려 주님께 다가가려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져야 합니다. 주님만이 그런 저와 여러분의 필요를 채워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어려움 가운데 찾아왔고, 무가치한 존재로 가까이 왔지만 그럼에도 축복을 누렸습니다. 이 여인은 몹시 떨면서 주님을 만졌습니다. 비록 순식간에 이루어진 접촉이었지만 믿음의 접촉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붙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잠시라도 주님께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면 감사해야 해야하는 것입니다. “제 안에 거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순간 예수님이 직접 돌아보시면 감사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단 한 번의 접촉으로 여인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꼭 기억하기 원합니다. 몇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한 번의 접촉으로 놀라운 치유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예수님이 누구를 보고 계실지 생각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지금 예수님이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을 느낀 적 있으십니까? 예수님이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을 경험해보면, 예수님이 수많은 만물 중에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즐거움을 누리고 위로를 받게 되는 지 알게 됩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예수님께 접촉하려고 기다리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렇게 스스로 물을지도 모릅니다.
‘나를 바라보실까? 나에게 사랑스러운 말씀을 하실까? 그분의 발밑에 앉도록 허락하실까? 무릎을 베고 휴식을 취하도록 허락하실까?’
그러나 주님께 다가가기를 시도해보시기 바랍니다. 떨리는 마음을 붙잡고 다가가시기 바랍니다.
사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그분 앞에서 가장 많이 떠는 사람들이 누구보다 그분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은혜가 있음을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창조자는 피조물이 더할 수 없이 낮아지는 순간 가장 높아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보잘것없다고 생각할 때, 그때 예수님의 우리를 향하신 크신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유명한 설교가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나라에 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손과 무릎을 바닥에 대는 것이다. 우리가 낮은 자세를 취하면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타락의 두려움은 존재할 수 없다. 가장 겸손한 마음, 자신을 전혀 무가치하게 여기는 생각 때문에 스스로를 비하하지 말고, 오히려 예수님을 더 자주 만날 수 있는 중요한 도구로 삼아야 한다. 스스로를 비울수록 주님을 위한 공간은 늘어난다. 우리가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주님은 더 많이 주신다.”
또, 스티븐 코비의 ‘오늘 내 인생 최고의 날’이라는 책에는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태평양 키니와타 섬에 '자니 링고'라는 사람이 있었다. 주변에서 성실하다는 평가를 받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동시에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샀다. 링고는 최근에 결혼했는데, 장인에게 암소 8마리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 섬에서는 결혼할 때, 남자가 여자의 아버지에게 암소로 대가를 치르는데 예쁘게 생긴 여자라면 암소 4마리, 조금 매력이 떨어지면 암소 3마리를 준다. 기도 없이 살 수 없는 힘든 여자라면 암소 1마리를 줄 수도 있다. 그런데 링고의 아내 사리타는 마른데다 어깨가 구부정한 빈약한 모습인데도 암소 8마리를 주었으니 주변의 비웃음을 살 만했다. 이곳은 뚱뚱한 여자가 인기였다.
어느날, 한 선교사가 링고의 집을 방문했다. 선교사는 링고의 아내 사리타를 보는 순간 놀랐다. 소문과 달리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의 여인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턱이 아름다웠고, 빛나는 눈동자를 지니고 있는 당당한 걸음의 멋진 여인이었다.
선교사는 링고에게 물었다.
“부인의 모습이 왜 소문과 이토록 다르죠?”
링고는 말했다.
“결혼 전에 여자들끼리 모여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한 여자가 나는 암소 4마리에 시집왔다고 말하면, 다른 여자는 자기는 암소 5마리에 시집왔다고 자랑합니다. 암소 1마리에 시집온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습니다. 나는 아내 사리타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부심을 가지라고 암소 8마리를 주고 결혼한 것입니다.”
링고는 암소 8마리의 가치를 지닌 아내를 원했다. 그래서 장인에게 암소 8마리를 준 것이다. 그랬더니 부족해 보이던 아내 사리타가 암소 8마리에 걸맞은 멋진 여인으로 거듭난 것이었다.
암소 8마리로 신부를 그만큼 가치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면, 하물며 예수님이 직접 자신의 핏값을 주고 사신 신부인 저와 여러분은 얼마나 가치있는 존재로 변해갈까요? 예수님은 우리를 더욱 가치롭고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어가십니다. 지금은 부족하지만, 아름답고 거룩한 주님의 신부로 바라봐주시는 예수님의 크신 사랑 가운데 날마다 나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3. 주님을 만진 여인은 오직 주님만이 해결책임을 믿고 나아갔습니다.
군중 속에 있던 여인은 예수님과 접촉했고, 그 결과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은 그 손을 통해 치유의 능력이 즉시 그녀에게 흘러 들어갔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어떤 질병이든지 치유됩니다. 치유는 몇 달이나 몇 년이 걸리는 것이 아니라 신속하게 완성됩니다. 질병이 말할 수 없이 심각할지라도 예수님 안에서는 넉넉히 치유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모든 질병을 완벽하게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합니다. 이 여인처럼 의사도 손쓰기 어렵고, 누구보다 절망적일지라도 예수님을 접촉하기만 하면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들에게 전해야 할 복음은 정말 소중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지는 것을 통해 그 어떤 귀신도 쫓아낼 수 있습니다. 군대 마귀가 들어간 사람처럼 행동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깊은 물로 쫓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정신이 돌아와 옷을 갖춰 입고 주님의 발 앞에 앉게 될 것입니다(막 5:1-15).
과거에 어떤 행동을 했을지라도, 믿는다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죄 때문에 완전히 주홍빛으로 물들었을지라도, 믿는다면 예수님의 보혈이 눈처럼 희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지옥 같은 암흑에 사로잡혀 구덩이에 처박힌 것 같을지라도,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단순한 믿음이 모든 것을 치유해서 천국에 있는 기쁨과 평안을 그 즉시 누리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크고 놀라우신 예수님 그 이름 안에 있는 능력을 날마다 배우고 경험해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 안에서 이러한 속삭임들이 들려옵니다.
“나는 아무리 해도 영적인 생활을 잘 해낼 자신이 없어.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이 딱 나에게 해당되는 말인 것 같아. 아마 오늘도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할 것이 뻔해!”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접촉하면 죽었더라도 지금 살아날 수 있습니다. 죽은 것처럼 보이더라도 분명히 다시 불러 일으키시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다가설 수 있도록 노력해야할 줄 믿습니다! 영원하신 성령님이 저와 여러분을 찾아와 도와주시고, 생명을 상실한 어두운 순간이 이내 더할 수 없이 소중한 순간으로 바뀔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삼상 2:8) 일으키시기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미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더 이상 높이 올리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낮은 곳에 처해 있을 때 기쁘게 우리를 들어 올려 귀족들과 함께 앉히시는 분이신 것입니다(삼상 2:8).
내가 아무리 심각한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을 때라도 나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대신 져 주신 예수님을 만나면 즉각적으로 회복의 은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산다!”
내가 정말 죽을 것 같을 때 나를 대신하여 죽어주신 예수님을 바라보세요!
그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세요!
“이 놀라운 부활의 권능으로 너와 함께 하고 있다!”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면 이 부활의 권능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새로운 생명이 우리를 둘러 덮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았던 여인은 자신이 건강해졌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습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이 오직 주님과의 접촉을 위해 다가가면 마찬가지로 회복이 나에게 임하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부르시면, 나를 찾으시면 나아가겠다고 말씀하는 분들이 간혹 계십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을 찾기로 하고 결단하고 예수님 가까이로 나아가면 그분이 오래전부터 계속해서 나를 부르고 계셨고, 간절히 찾고 계셨고, 이제껏 기다리고 계셨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예수님께 나아가야합니다.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어도 나아가야 합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여러분이 알고 있듯이 여인은 실제로 예수님을 만졌습니다. 접촉의 순간에 여인이 어떤 질병을 앓고 있었든지 간에 그것은 진정한 믿음의 접촉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로 담대히 다가갔습니다.
만약 베드로를 만지는 것으로 만족했다면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요한이나 야고보를 만진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인은 주님을 만졌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주님을 만지기 전까지 만족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손을 뻗어 예수님을 만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피를 흘린 희생, 죽음을 감수한 사랑, 부활의 능력, 하늘을 향한 호소를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는 순간, 살짝 접촉하기만 해도 영혼에 필요한 축복을 확실히 얻게 됩니다.
주님을 만나면 회복됩니다. 주님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지 알게 되고,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깊이 사랑하려면 먼저 주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웬디 알렉의 ‘무명선지자의 기도’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주님의 음성으로 오늘 말씀을 맺겠습니다.
"나에게 달려나오라"
사랑하는 자야,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것을 아느냐?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내가 얼마나 너와 함께 걷기 원하는지 아느냐?
내가 얼마나 너와 이야기하기를 기뻐하는지 아느냐? 얼마나 너의 목소리 듣기를 원하는지 아느냐?
얼마나 너와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을 그리워하고 있는지 아느냐?
사랑하는 나의 자녀야,
너와 교제하기를 나는 너무도 갈망한단다. 너를 품에 안으려고 할 때마다 나를 거절하는 너를 바라보며 내 마음이 얼마나 슬픔에 잠기는지 아느냐?
사랑하는 자야,
나는 너를 축복하기 원하는 하나님이다.
네가 오해와 어두움 속에서 상처받고 있을 때 내가 너의 곁에 있었다. 너는 알고 있니? 내가 네 마음의 고통을 안다는 것을.
나의 사랑하는 자녀야,
나는 너를 위로하고 축복하고 싶어 기다리는 하나님이다.
인생의 폭풍속에서 달려나와 나에게로 오라!
나의 두 팔을 붙들라! 내가 너를 안아 주리라!
내 품에 있으면 너의 세상 염려와 모든 고통들은 다 사라지게 될 것이다.
나의 자녀야, 용기를 내고 담대하라!
너의 갈길은 나의 앞에 있단다.
나는 전능자이며 너를 구원할 구원자이다.
너를 향한 사랑과 기쁨으로 나의 마음이 벅차오른다. 스스로 가치 없다여기고 실패로 인해 낙심할 때에도, 나는 너를 향해 두 팔을 내밀어 "오라! 오라! 나의 품으로 달려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네 자신을 내려놓는 일은 오직 나의 품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네가 나의 얼굴을 찾을 때, 너의 모든 속박들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나에게로 오라.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내 품으로 달려오라.
사55:6(확대번역본)
"여호와를 발견할 만한 때에 여호와를 찾고, 묻고 필요함으로 요청하라(필요함으로 그리고 정당한 권리로 그분을 청구하라.). 그분이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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