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4장 18-19절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18절을 다른 번역(흠정역 난외주)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쓸쓸히 내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
예수님은 약 3년 반의 공생애 기간동안 제자들의 온갖 섬김을 받으셨을 것 같지만, 성경을 자세히 보면 제자들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온갖 어려움을 해결하셨고, 제자들의 짐을 감당하셨고, 그리고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어렵고 심각한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스스로 해보려고 애썼지만 도무지 해결이 안되어서 이제 가망이 없다고 느껴질 때면, 예수님이 오셔서 흐름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함께 하셨기에 행복했고 안전했습니다. 마치 아이들의 든든한 아버지처럼 제자들에게 기쁨이 되어주시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곧 다가올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자신들이 이제 고아처럼 버려진 신세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두려운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품은 두려움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불안한 마음을 채 표현하기도 전에 이 말씀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제가 임의로 풀어서 표현하자면 이런 말씀이 될 것 입니다.
“너희는 이 거칠고 메마른 세상에서 홀로 지내지 않을 것이다. 비록 육신은 함께하지 않더라도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너희와 함께할 것이다. 나는 영적으로 너희를 찾아오겠고, 영적으로 임재할 때 내가 육체적으로 함께하거나 너희 가운데 계속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누리게 될 것이다.”
1. 예수님은 살아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이유 모를 상실감이 찾아온다면, 내가 예수님과 멀어지지 않았는지 다시한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성령님과 동떨어져 지내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어느새 고아처럼 불행과 외로움이 침습해 들어옵니다. 아무리 많은 등불을 밝혀도 태양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처럼, 세상에 있는 좋은 것들로 아무리 마음을 달래보려고 해도 잠시 후엔 다시 외로움이 느껴져서 결국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성도의 마음을 만족케 할 만한 존재가 그 어디에도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절대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오셔서 우리의 외로움을 완전히 물리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로 오리라.”
주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부모를 잃어버린 사람을 일컬어 '고아'라고 부릅니다. 이미 그 단어 자체가 상당한 슬픔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고 아껴주던 부모가 이제는 더이상 사랑하고, 보호하고, 도와줄 수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저와 여러분은 절대 고아가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죽어있거나 멀리 떠나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던 것은 사실입니다. 병사 가운데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상처에서 물과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이것은 생명이 완전히 파괴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지금은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의 무덤 앞에서 천사가 말했습니다.
마28: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죽음의 굴레는 예수님을 붙잡아 두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죽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완전히 이기고 정복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여전히 실체를 유지하는 살아 계시는 존재로 대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시고, 오히려 더욱 풍성한 생명의 능력으로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예수님이 지금 살아계시기에, 우리는 더 이상 고아가 겪는 슬픔을 겪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2. 예수님은 우리를 혼자 두지 않으십니다.
부모의 죽음으로 인해 고아가 겪는 가장 큰 슬픔 가운데 하나는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힘이 들 때면 아빠에게 달려가 그 등에 업히고 아플 때면 엄마의 가슴에 기댈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라고 부를 수는 있어도 대답을 들을 수 없고, 다정하게 “어머니”라고 부를 수는 있어도 죽은 사람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곳에 육체로 계신 것은 아니지만, 육체적으로 함께하시는 것처럼 그분의 영적인 임재를 통해 그 축복된 보살핌이 우리를 둘러 덮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실제로 이 땅 위를 걸으셨을 때보다 더 나은 것을 우리는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보내시던 시절에 함께 살았다면, 우리 모두 한꺼번에 예수님과 다정하게 마주하기 힘들 것입니다. 겨우 옷자락이라도 만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줄을 서서 기다릴 텐데, 만약 예수님이 육신의 형태로 여기 계신다면 어떻게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갈 수 있겠습니까? 순번표를 받고 기다려야 한다면 어떤 사람은 평생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생각을 알고 계시고 그와 동시에 우리의 모든 필요에 귀를 기울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할지라도 예수님께 다가가기 위해 군중 틈에 끼여 고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은 물론 전 세계 모든 주의 자녀들과 가까이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장소와 관계없이 임재하시기에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자녀들은 언제든 어느 곳에서나 그분과 함께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순간에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슬픔에 관해 주님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마음을 쏟아낼 때, 그 모든 마음을 넉넉히 받아주시는 주님이 실제로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허상이 아닙니다. 그분의 손을 잡고, 눈에서 반짝이는 사랑을 보고, 그리고 그분의 긍휼하신 얼굴을 심령으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그분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부모가 자녀를 다정하게 안아주듯이, 예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위로해주십니다.
3. 예수님은 우리의 공급자가 되십니다.
부모를 잃은 고아는 먹을 음식과 입을 곳, 그리고 살 곳을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됩니다. 슬픔을 털어낼 시간도 없이 생존의 문제를 마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훨씬 더 풍성하게 공급하십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지상을 계실 때 제자들이 누렸던 것보다 더 다양하고, 더 풍성한 공급이 우리에게 부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요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우리의 영혼이 굶주렸다고 느낄 때에도, 우리는 언제든지 예수님을 통해 하늘의 양식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에 갈증이 생길 때마다, 언제든지 예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수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찾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배고픈지 목마른지 그분 앞에 나아가 말씀드리면, 주님은 즉시 채우시고 우리의 영혼을 만족케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40:17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예수님은 지금도 저와 여러분의 목자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죽음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 영광스러운 언덕의 기름진 풀밭에 다다를 때까지 도움을 베푸실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의 기쁨을 주님과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무엇인가 부족해서 세상 앞에 비굴하게 무릎을 꿇거나 타협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버리시지 않고, 떠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13:5-6
5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4. 예수님은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무엇보다 고아는 어린아이에게 필요한 교훈 역시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정상적인 부모를 가진 아이라면 바른 인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 부모에게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뛰어난 교사를 만나서 배울 수 있는 것도 있겠지만, 부모의 사랑으로 자녀의 마음을 형성하는 부분을 보충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직접 강대상에 서셔서 말씀을 전하시면 가장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설교자를 통해 말씀을 듣게 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후5:16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요일1: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설교자가 말하든지, 아니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말하든지 간에, 결코 말하는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만이 말씀의 능력을 갖고 계시고, 그 말씀을 생기있게 만들어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찾아오시면 성경에 담긴 진리를 단순히 지식적인 차원을 넘어 실제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성령님의 가르침에 힘입어 진리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오랫동안 뜻을 파악하기 어려웠던 것들을 알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겸손하게 바라보면 그분의 영이 여전히 교훈은 허락하실 것입니다.
성령님께 가서 하나님에 관한 것들을 배우게 되면 신학자들도 미처 깨닫지 못한 진리를 깨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책과 율법의 문자에만 집착하고 사람들에게 배워서 아는 것을 어리석게 생각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가서 그분의 발 앞에 앉은 채 성령을 통해 배우기를 청하면 디모데후서 3장 15절의 말씀대로 가장 귀한 지혜인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시지 않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옆에는 언제나 함께하시는 선생님이 계십니다.
5. 예수님은 우리의 변론자가 되어주십니다.
고아의 또 다른 아픔은, 곤경에 처했을 때 자기편이 되어줄 부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어린아이를 괴롭히면 그 아이의 입에서 곧장 튀어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아빠에게 일러줄 거야!”, “엄마한테 다 이를 거야!”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 없을 때의 상실감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강도가 나타나서 다 빼앗아가고, 심지어 사랑하는 부모님이 남겨준 작은 유품까지도 다 빼앗아간다 할지라도, 고아의 소유에 대해 성심껏 변호해줄 사람은 거의 찾기 힘듭니다. 아버지가 법정에 있다면 자신의 권리를 증명할 수 있지만, 그런 아버지가 없다면 고아는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세상의 악한 자에게 자신의 소유를 빼앗기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에도, 그리스도인들은 고아가 아닙니다. 사탄은 할 수만 있으면 우리에게 주어진 유산을 강탈하려고 하지만, 우리를 위해 호소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변자로 계십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약속을 빼앗고 언약에 따른 모든 위로를 파괴하고 싶어하지만,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원수가 우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우리에게 이 사건의 변론자가 없다고 우기며, 또 그렇게 우리가 믿도록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분명 높은 곳에 계시는 변론자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를 위해 죄인의 친구로서 호소하십니다. 그분이 법정에서 호소하시면 패배할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산을 지키지 못할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혼자가 아닙니다.
세상에 친구가 없더라도, 여러분의 어려움을 보살펴 줄 사람이 없더라도, 정말 외롭게 지내고 있다 하더라도,
잊지 마세요!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실제로 동행하시면서 도울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실 준비가 충분히 되어 계십니다.
바로 이 순간에도 선하고 친절한 보호자가 우리 곁에 아주 가까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각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너와 함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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