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장 26-35절]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2006년에 개봉한 "헷지"라는 애니메이션이 있습니다. 인간들의 무차별적 개발로 식량난에 허덕이게 된 동물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시 근교로 이주하기로 결정하고 숲에서 나오는 용감한 동물들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너구리 '알제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시에 사는 인간들은 그들의 몸에 끊임없이 음식을 집어넣는 밑 빠진 항아리야. 그래서 동물들은 인간의 울타리 근처만 돌아다녀도 언제나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어. 우리는 살기 위해 먹지만, 인간은 먹기 위해 살아.”
자기가 말한 것이 무엇인지 직접 보여주겠다고 다른 동물들에게 제안합니다. 그들은 도시로 들어가 어떤 인간 가족을 살며시 엿보는데, 인간의 입이 파이가 들어가는 구멍이고, 인간은 하루 종일 소파에 누워서 쉴 새 없이 감자칩을 집어먹는 존재이며, 전화기는 음식을 소환하는 장치로 일단 사용하면 피자 배달부 바로 현관문 앞에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음식을 가져오고, 가져가고, 싣고, 운반하지!”
음식 그림이 붙은 광고판, 트럭들. 동물들은 인간이 하는 일들이 모두 음식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간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기도하는 장면에서 동물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저기가 그들이 음식을 예배하는 제단이야!”
또, 러닝머신을 가리키며 외칩니다.
“저건 인간이 더 많은 음식을 먹을 수 있게, 그리고 더 많은 음식, 더 많은 음식, 더 많은 음식을 먹을 수 있게 죄책감을 제거해주는 기계야!”
성경에서 음식은 언제나 하늘에서 오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먹일 좋은 것들을 엄청나게 많이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먹는 것이 단지 인간의 육체에 연료를 공급하는 행위가 아니라 기쁨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다양한 음식과 맛을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그 맛을 제대로 잘 느낄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의 혀에 1만개의 미각세포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을 먹고”(전9:7)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영양소를 가진 간단한 음식물을 만들어서 그것을 인간들에게 그냥 질겅질겅 씹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말 넉넉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음식물을 포함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에서 온전한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먹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좋은 선물들을 왜곡해서 우리의 발목을 낚아채는 올가미나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는 덫으로 변질시켜 버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좋은 식당에 가서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음식을 많이 먹는다는 것이 우상을 숭배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위해 해주실 있는 것들을 음식이 해주기를 기대하기 시작할 때, 바로 그럴 때 문제가 시작됩니다.
일상에서 예상 밖의 실망을 맛보았기 때문에, 직장상사에게 불쾌한 내용의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에, 감당하기 힘든 일 때문에 짜증이 밀려올 때... 바로 그때, 꼬르륵 소리를 내는 배의 문제를 신속히 해결하는 것처럼, 영혼이 곤고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 음식으로 해결하려고 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달콤한 카라멜마키아또, 바삭한 치킨에 시원한 맥주 한잔으로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 현대인의 일상이 된지 오래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뭔가 힘들어진 때, 씹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씹는 것은 “신속하고 확실한 위로”를 한방에 공급해주기 때문이지요.
‘위로를 주는 음식’이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얼마나 친숙합니까? 하루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음식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삶이 퍽퍽하다고 느낄 때 첫째로 느끼는 충동이 바로 음식에 의지하려는 것입니다. 간편하게 언제든지 얻을 수 있고, ‘맛’이라는 느낌이 기분을 풀어주는 강력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 중에 언제 음식을 탐닉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퇴근하고 돌아와서. 모든 잠든 후에 자신에게 상을 주고 싶을 때.
그러나 “위로자”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일컬어 사용하신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여러분의 하루에 대해 기꺼이 여려분과 대화할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평화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선물을 주시기 위해, 그래서 여러분들을 강하게 만들어주시기 위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만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음식이 예수님의 경쟁 상대가 되었던 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그들의 육신의 배고픔을 채워줄 음식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영혼을 채워줄 예수님을 선택할 것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촉구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인 남자만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성과 어린아이를 다 합치면 1만 5천명은 되었을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추측합니다. 그들은 배가 고파서 뭐라도 먹어야 했습니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여러분 다 잘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맘껏 먹이셨습니다. 마치 무한리필 식당에 온 것처럼 사람들은 실컷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을 만큼 풍성한 식사를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 기적을 체험하여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기를 원하셨고,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6:25)라고 물으며 가르치셨던 산상수훈의 진리를 깨닫기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들이 육신의 배를 채우고자 하는 것과 같은 열정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영혼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갈망하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밤중에 조용히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잠에서 눈을 뜬 무리들은 예수님을 따라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왔습니다. 아마도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오지 않았을까요?
“어제 먹었던 음식은 다 소화가 되어 없어졌어. 오늘 ‘예수님 식당’의 메뉴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분명히 이른 아침에도 식당 문을 열어주실 거야!”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6: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예수님은 그들이 해야 할 모든 일들이 그저 자신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그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표적을 베풀어 달라고 제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옛날에 모세와 우리 조상에게 해주셨던 것처럼 하늘에서 따끈따끈한 떡 같은 것을 내려주시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그들은 친절하게도 예수님께 성경 말씀까지 인용해드렸습니다.
요6: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성경에는 무리들 가운데 누군가가 아무 뜻 없이 예수님에게 그냥 한 번 그런 말을 해본 것이라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들은 분명 떡에 정신이 팔려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떡 몇 개와 생선 몇 마리로 무려 1만 5천명을 먹이신 것이 바로 어제인데, 지금 또 다시 이적을 베풀어 예수님을 믿어야 할 이유를 입증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생명의 떡으로 자신들의 영혼을 배불리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배를 만족시키는 것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요6:35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비록 그들이 알지 못하지만 자신이 바로 그들이 찾는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군중들은 뭔가 먹을 것을 바라고 예수님께 나아오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수님 자신을 내미십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만족하고 있습니까?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되어버렸는지 요한복음 6장 66절에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요6:66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이 구절은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순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중단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어떤 신을 섬길 것인지 선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이 식권을 주지 않으셔도 계속 예수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여러분의 배를 위한 음식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영혼을 위한 음식입니까?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이 말씀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며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를 실제적으로 채우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로하고 채우고 회복시키실 수 있도록 음식이라 불리는 즐거움의 신을 파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빠진’ 지속적인 즐거움을 우리에게 주지 않으십니다. 또 주실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도 어긋나고,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에도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식습관을 잘 살펴보고 음식을 먹을 때 왜 먹는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즐거움을 위해 먹는가 아니면 영양을 위해 먹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지 위해서가 아니라 즐거움 자체만을 추구하면 하나님의 좋은 선물이 우상으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먹는 것들이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먹는 행위 자체가 예배 행위가 될 수 있다면서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을 통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나는 어떻게 음식을 대하고 있나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식사기도를 할때에도 단순히 "음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 아니라 내가 이 음식을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할지 결단이 필요한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세상이 주는 위로보다 하나님의 긍휼로 부어지는 참된 위로를 구하여 받을 줄 아는 복된 삶이 저와 여러분 가운데 가득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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