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1:1-10]
1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5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
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지고 주일 예배 외에 다른 모임은 모두 중단시키거나 축소시킨지 벌써 수개월이 되었습니다.
성도님들이 가끔씩 그렇게 여쭤보세요. “목사님, 그래도 요즘에는 좀 덜 바빠서 좋으시지요?” 덜 바빠서 좋은 것은 사실이니까 웃으며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 한 구석에서는 계속 이러다가는 큰일인데 하는 걱정이 늘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모든 예배가 축소되고 마음껏 기도하고 찬양하지 못합니다. 찬양시간 우리 성도님들을 봐도 마스크 다 쓰시고 답답해서 소리도 못내고 계신 분들이 많은 것 같아 제 마음이 더욱 답답해집니다. 기도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리 내어서 통성으로 기도하지 못하니까 더 깊은 기도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더욱 걱정되는 것은, 대면예배 제한이 비교적 풀려도 여전히 교회로 나오지 않는 성도님들 때문입니다. 여전히 코로나의 위험이 있고 완전히 제한이 풀린 것은 아니지만 코로나 이전에 비해 출석률이 절반도 안됩니다. 물론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다녀오셔서 출석을 자제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오래 보이지 않는 분들 때문에 걱정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당연했었는데, 코로나 이후로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지, 집에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릴지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이 발달해서 바이러스의 위험을 피해 이렇게라도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직접 나와서 예배드리지 않아도 괜찮더라는 생각을 가지게 될까봐 걱정이 됩니다. 실제로 대면예배 제한이 풀렸는데도 교회에 성도님들이 나오지 않아서 문을 닫는 소형교회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또 얼마전에 뉴스를 보니까 코로나 이후로 새로운 형태의 교회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회 건물이 없고 성도들끼리 다함께 만나지도 않습니다. 목사님이 영상으로 말씀을 전하면 모든 성도들은 각자 집에서 편하게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이 필요한 경우에만 성도들에게 개별적으로 연락을 하여 목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도 요즘 집이며 건물이며 다 비싸지는데 교회 건물 때문에 월세 낼 필요도 없고 언택트 사회에 어울리는 새로운 교회라며 뉴스에서 소개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이런 교회가 진짜 교회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믿는 자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의 감격을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교회가 좋아보일지 몰라도, 저는 절대 그게 정상적인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예배가 무엇인지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코로나가 와서 예배를 무엇인지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예배가 무엇인지 잊고 있다가 코로나 때문에 그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가짜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가짜로 예배드리는 신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말라기는 오늘날처럼 가짜로 예배드리는 신자들이 많았던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께 하신 말씀을 선지자 말라기가 받아서 기록한 성경입니다.
말라기는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말라기라는 이름의 뜻은 ‘나의 사자, 영어로 표현하자면 My Messenger’입니다. 신약시대를 여는 선지자가 세례 요한이었다면 말라기는 구약시대를 마무리하는 선지자였습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대는 B.C. 435년에서 415년 사이 정도로 추측하는데, 당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느헤미야의 지휘 아래 성벽과 성전을 재건했을 무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겨우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방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타락과 방탕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고대하던 성전도 완성되고 압제에서 풀려나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게 되어서 성전에 사람들은 많이 모였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그들의 예배가 너무나 형식적이었고 오히려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예배란 무엇입니까?
교회의자에 앉아서 설교 듣는 것입니까? 은혜 받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무엇이 참된 예배인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구약시대에는 소나 양 같은 동물을 죽여서 제단 위에 올려놓고 태우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는데,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오셔서 직접 그 제단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제 피가 흐르는 마지막 제단이었고, 예수님의 몸은 실제적으로 드려진 마지막 제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 이후 우리는 더 이상 구약시대처럼 양이나 소 같은 동물로 제사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예수님보다 완전한 제물은 더 이상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 존재했던 제사의 정신은 그대로 신약의 예배로 옮겨졌습니다. 이제는 동물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내어드리는 것 이게 예배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가 뭔지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집에서도 편하게 예배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타락하기 시작할 때, 항상 먼저 일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소홀해지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적으로 말하면 예배가 엉망이 된다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말라기 시대의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너희가 잘못된 제사로 내 이름을 멸시하고 내 제단을 더럽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당시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어떻게?”라고 반문합니다. 함께 본문 6절을 다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말1: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 ‘어떻게’라는 질문은 다음 7절에서 한 번 더 나옵니다.
[말1: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풀어쓰고 있습니다.
“너희는 말한다. 그럴 리가요? 저희가 어떻게 주님을 멸시한단 말씀입니까? 너희의 조악하고 천박한 예배로 나를 멸시한다. 너희에게 하나님의 제단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더 이상 최우선 과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이 나를 멸시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로 인해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예배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는가? 아니면 오히려 우리의 예배로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시게 하고 있는가?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1.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하나님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예배입니다.
본문 6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말1: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본문 6절에서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배자의 가장 중요한 태도가 ‘공경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 ‘공경’이라는 단어를 ‘노인공경’ 같은 표현에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 의미를 잘 모르고 넘어가기 쉽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공경’은 무슨 뜻일까요? ‘공경함’이라는 단어의 히브리 원어는 ‘카보드כָּבֹוד’인데, ‘무겁다’라는 뜻의 원어 ‘카베드כבד’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예전에 유행했던 영화 대사 중에 “뭣이 중헌디?”라는 말이 있습니다. ‘뭣이 중헌디’의 ‘중(重’)자가 한자 ‘무거울 중’이니까, 무엇이 무거우냐? 무엇이 중요한지 서로 저울질 해볼 때 어떤 것이 더 중요한가? 다시 말해, 어떤 것이 더 무거운 가치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단어 카보드도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중한지, 어떤 것이 더 무거운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아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공경함이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가치있는 분인지 깨닫고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무거운 가치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 11절에도 이와 비슷한 개념이 쓰여져 있습니다.
[계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여기서 ‘합당하오니’라는 표현을 쓰는데 ‘합당’이라는 단어의 헬라 원어는 ‘악시오스ἀξίως’입니다. 저울에 무게를 달아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방금 읽은 말씀에서 보좌 앞에 24장로들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이시기에 이 세상의 모든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실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으신 분입니다!”
다시 말라기 1장 6절로 돌아와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의 아버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말1: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살아가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가치있는 분이시며,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배 자리로 나아올 때마다 하나님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계십니까?
[마15:8-9]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겉모습으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으로는 전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라 사람의 계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 눈치 보기에 급급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예배하러 나오는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받고 위로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위로 받기 위해서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내가 너의 아버지인데,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고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거룩한 두려움을 가진 예배입니다.
본문 6절을 다시 한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말1: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본문 6절에서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라고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기 우리의 제사, 우리의 예배에 반드시 존재해야 할 태도 중 하나가 두려움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두려움은 형벌적인 차원에서 이해되는 공포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가져야 할 경외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경외에 관련된 대표적인 잠언 구절은 잠언 9장 10절 말씀입니다.
[잠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그런데 이 지혜가 무슨 지혜입니까? 물론 공부를 잘하게 해주는 지혜일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담임목사님이 쓰신 ‘구원에 이르는 지혜’라는 책에서도 입증하는 것과 같이, 죄악으로 인해 멸망으로 이를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경외와 관련된 잠언의 또 다른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잠14: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잠16:6]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성도를 하나님의 구원으로 온전히 이끄는 구원 사역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도 바울은 이 두려움을 귀하게 여겼던 사람입니다.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귀한 것을 끝까지 간직하기를 소원했습니다.
[빌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우리 시대에 선포되는 많은 말씀들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강조합니다. 더 이상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닌 가까운 친구나 연인으로서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물론 성경은 주님이 우리를 모든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로 부르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주님이 우리를 정결한 신부로 삼아 영원히 사랑하기 원하시는 신랑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 이전에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시대의 말씀이 친근한 하나님, 부드러운 하나님, 한없이 인자하신 하나님에 대해 강조하는 동안 상대적으로 잃은 것이 있습니다. 초월적인 절대자 하나님, 모든 만물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상실한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습니다. 쉽게 죄를 범하고 쉽게 용서를 구하는 대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변질시켜버렸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범죄가 드러나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달아 알았을 때 극심한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자신의 명예가 훼손될까봐 두려워했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왕위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까봐 두려워했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떠나실까봐 그것이 두려웠습니다.
[시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이 시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에 습관적인 죄가 범람하고 있어도 주님이 주님 앞에서 자신을 쫒아 내실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서 성령님이 떠나가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말라기 시대에서 하나님이 백성들을 향해 물으셨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물으실 것입니다.
“너희의 두려움이 어디 있느냐?”
너무나 많은 예배가 감성적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많은 신자들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보다 코로나가 두렵고, 하나님보다 사회적인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교회를 못 나옵니다. 정부에서 언론에서 자꾸 교회가 코로나를 퍼뜨리는 주범처럼 몰아가니까 신자들이 먼저 겁을 먹어서 움츠러듭니다. 교회 출석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밖에서도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왜 그렇게 두려워합니까?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거룩한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거룩한 두려움으로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깨닫는 예배입니다.
본문 7절, 8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말1:7-8]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여러분들이 만약 직장상사나 사업상 중요한 인물을 개인적으로 한번 독대해서 만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선물을 준비해야 할 상황이라면 어떤 선물을 준비 하겠습니까? 만약에 낡거나 부서진 물건을 선물로 준비해서 준다면 그 사람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이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정말 나를 무시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그런 선물을 받으셨습니다. 더럽고 병들고 온전치 못한 것들을 선물로 받으셨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필요없는 것들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거지취급 당했고, 바보취급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되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서론에서 읽었던 로마서 12장 1절을 다시 읽어 봅시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는 소나 양 대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어떤 모습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졸리는 모습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스마트폰에 빠져 있는 모습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또 어떤 사람은 눈은 뜨고 있는데 말씀은 듣지 않고 전혀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상태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면서도 본인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는 예배를 드리지 않고 딴짓하고 있구나.” 정도로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너는 나에게 상처를 주는구나.”라고 반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너무 예민하신 거 아니예요?”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토록 예민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상처를 받으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말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차라리 성전문을 닫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셨습니다. 우리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지치면 방문을 닫고 꽁하게 혼자 방 안에 틀어박히고 싶어지는 것처럼 하나님도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에 지쳐서 방문을 닫고 혼자 계시고 싶어하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10절 말씀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기 원합니다.
[말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내가 성전 문을 닫아버리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아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굳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상처를 받으시면서도 찾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까? 나를 이해하고 정말 귀하게 여겨주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더 상처받지 않도록 그들을 가로막아 나에게 위안이 되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을까?
하나님이 좋아하셨던 다윗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보고도 사람들이 꼼짝도 못하고 있자, 다윗이 참지 못하고 나섰습니다.
민수기에 등장하는 비느하스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음행을 행하는 남녀를 창으로 찔러 죽인 비느하스에 대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민25:11]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배를 온전히 드릴 뿐 아니라, 예배를 정상적으로 드리지 않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 거룩한 분노를 가져야 정상입니다. 요즘처럼 집에서 영상으로 예배를 편하게 드리니까 좋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 취하는 태도에 대해 의분을 가져야 정상입니다. 설령 나 자신에게서 그런 태도가 발견된다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예배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인데 편하게 예배를 드리겠다는 생각부터가 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배시간에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실 때 온전한 모습으로 드리십시오. 하나님이 나에게 가장 귀한 분이라는 사실은 온 마음과 온 몸으로 드러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들으십시오. 기도시간이 되면 하나님께 집중해서 여러분의 모든 것을 다해 기도하십시오. 편하지 않을 것입니다. 힘이 드는 것이 당연합니다. 여러분은 관객이 아니라 제물로서 예배에 와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 조금 뒤에 있는 13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말1: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이 시대는 하나님께 나아와서 드리는 예배를 번거롭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면서 하나님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편한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신의 여가시간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대충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생각합니다. 안 받으셔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배 받으시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말1: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되물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아무런 자격이 없는 야곱을 에서보다 더 사랑했던 것처럼 너를 사랑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서 나는 왜 항상 이 모양인가요?”라고 묻지만, 하나님은 “네가 이 모양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사랑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아버지라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주인이라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이 우리를 예배로 인도하십니다. 참된 예배를 통해 우리를 만나주시고, 새로운 사랑으로 우리를 덮어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처럼 예배 드리기 어려운 시절에 참된 예배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령 가정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더욱 진실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찾고 구하는 은혜를 여러분 가운데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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