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나눔

선택하여 사랑하는 기쁨(1)(수24:14-15)

아침묵상 2021. 3. 16.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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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24장 14-15절

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흥미로운 심리학 실험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버드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엘렌 랭어’라고 하는 사람이 미국의 어떤 요양원에서 실험한 내용입니다.

 

요양원 2층에서 지내는 노인들과 4층에서 지내는 노인들로 그룹을 나누고 서로 다른 내용을 전달했다고 합니다.

 

먼저 2층에 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여러분들을 위해 방을 꾸며 주겠습니다. 화분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화분은 직원들이 직접 관리해줄 것입니다. 영화도 보여 드릴텐데 저희가 알아서 날짜를 정해 상영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4층에 가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도와드릴 테니 원하는 대로 방을 꾸며 보십시오. 화분을 선물로 드리기 원하는데, 원하지 않으시면 받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신 받으신 분은 직접 키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영화를 언제 보실지 서로 의논해서 알려주시면 그 날짜에 맞춰 상영해드리겠습니다.”

 

그 외에도 2층 노인들은 가만히 앉아서 호의를 제공받도록 환경을 만들어주고, 4층의 노인들은 자율적인 선택권과 무언가를 하도록 여러 가지를 권장했습니다. 2층의 노인들은 그저 주어진 대로 편하게 생활했습니다.

 

반면, 4층의 노인들은 자신의 선택으로 식물을 직접 키웠고, 언제 무슨 일을 할 것인지를 계획해서 생활했습니다. 그래서 4층의 노인들은 이전보다 더욱 바빠졌고, 2층의 노인들은 4층의 노인들이 가꾼 화분을 감상하며 한가롭게 지냈습니다.

 

그러고 3주가 지나 두 그룹을 대상으로 삶이 행복한지 물었더니, 놀랍게도 4층의 노인들이 행복하다고 답한 비율이 훨씬 높았습니다. 18개월 뒤 두 그룹의 건강 상태를 비교해봤더니 2층의 노인들은 71%가 더 허약해졌던 것에 반해, 4층 노인들의 93%가 건강이 더욱 좋아졌습니다. 그뿐 아니라, 4층은 사망률도 2층에 비해 절반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 실험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무리 허약한 노인이라도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그래야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 살 수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율성의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왜 공부를 하기 싫어합니까? 매일 ‘공부해라, 공부해라’ 잔소리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공부하려고 책을 펴고 있는데 갑자기 엄마가 또 나타나서 공부해라 잔소리하면 하고 싶던 공부도 하기 싫어지는 것이 바로 이 ‘자율성의 욕구’ 때문입니다.

 

만일 자율성의 욕구가 계속 충족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점점 스트레스를 받고 무기력해지기 마련입니다. 반대로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라 본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느낄 때 행복해집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예수님을 믿어서 본인도 믿게 된 모태신앙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편이나 아내에게 억지로 끌려 나와서 교회에 나오다 보니 지금도 나오고 있다는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역 또는 목회는 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사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목사님이라서 남들보다 뛰어난 신앙생활을 하도록 양육 받은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오늘 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선택하여 사랑하는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말씀 나눌 때, 주님이 원래 저와 여러분 안에 주시기 원했던 사랑에 대해 더욱 깨달아지는 귀한 시간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1.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하는 기쁨이 있는 삶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택하는 기쁨을 주셨다고 하면 깜짝 놀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는 ‘이거 하면 안 돼. 저거 하면 안 돼. 이거 이거는 꼭 지켜야 해. 안 지키면 지옥 가.’ 이런 말씀만 있는 줄 알았는데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다고요?”

 

그러나 창세기를 1장을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실 때부터 인간에게 선택하는 기쁨을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1:29-30]

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여러 가지 먹을거리들을 이 땅 가운데 창조해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상상해봅시다.

 

“내가 하나님이라서 제일 잘 아는데, 과일은 역시 바나나가 최고란다. 그러니 너희는 바나나만 먹도록 하여라. 바나나 나무는 온 천지에 생육하고 번성할지어다!”

 

바나나만 좋아하시는 분은 몰라도 저는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각양 채소와 과일들을 인간에게 주시며 심히 좋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해와 달, 낮과 밤을 만드셨고, 땅도 만드시고 바다도 만드시고, 우주에 별도 셀 수 없이 많이 만드시고(똑같은 별이 하나도 없도록 다양하게), 수많은 동물들과 식물들, 사람들이 발견해서 쓰게 될, 수없이 많은 광물들과 재료들까지 그 모든 것을 만들어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양하게 만들어진 세상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들, 어떤 취미를 갖고 계십니까? 무엇을 가장 좋아하세요? 좋아하는 운동,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음악, 좋아하는 동물 등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것이라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법입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신 것들은 전부 제각각 다르겠지만 신기한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누가 여러분에게 그것을 좋아하라고 강요해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좋아하기로 선택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이 세상을 만들어 인간에게 주실 때 좋은 것들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인간이 얼마든지 스스로 이것을 좋아한다고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셀 수 없이 다양한 것들로 채워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진심으로 좋아하고 어떻게 진심으로 사랑하는 존재인지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이 진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을 인간에게 주시면서도 사실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한 가지 소원이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이 모든 것들보다 하나님을 선택하여 사랑해주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이 쓴 「그 발 앞에 엎디어」에는 이와 관련된 아름답고도 매우 중요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때 한 어머니가 뜰 안 숲 사이에 몸을 숨겼다. 그때 아기가 울면서 여기저기 그 어머니를 찾았다. 그러나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때 종이 와서 아이를 보고 ‘도련님, 울지 말아요. 이 나무 위에 망고를 봐요. 이 뜰 안에는 아름다운 꽃들을 봐요.’ 하였다. 그러나 아이는 울면서 ‘아니, 싫어. 나는 어머니가 만나고 싶어. 어머니가 주는 것이 어느 망고보다도 맛있어. 어머니의 사랑이 모든 꽃보다도 좋아. 너는 이 동산이 내 것인 줄 모르는구나. 우리 어머니 것은 다 내 것이다. 그런 것은 관심 없다. 나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 하였다. 그때 나무 그늘에 숨어 있던 어머니가 듣고 달려 나와서 아이를 가슴에 안고 몇 번이고 입을 맞추었다. 그때 아이에게 그 동산은 낙원으로 변하였다. 이와 같이 나의 사랑하는 무리들은 이 큰 세계의 동산에 있어 여러 가지 아름다운 것이 마음을 끔에도 불구하고 나를 발견하기까지는 참 기쁨을 맛볼 수 없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어머니의 마음이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 세상을 좋은 것으로 가득 채워 우리에게 안겨주시면서도 이 모든 것들보다 하나님 아버지를 선택해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바로 그분의 본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아이처럼 탐스러워 보이는 세상의 모든 열매들을 뒤로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고 찾는다면, 하나님을 가장 우선으로 사랑하기로 선택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는 그러한 기쁨을 하나님과 함께 나누기 위해 지음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것을 깨달았던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빌3:7-8]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후략)

 

누군가가 억지로 시켜서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의 선택으로, 다른 말로 ‘주도적인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선택한 사람에게는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으로 인해 놀라운 변화가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 안에도 이런 기쁨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닌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늘 섬길 신을 너희가 선택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40년 동안 하나님을 따라서 광야를 지나고 마침내 가나안땅까지 이른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오늘 새롭게 택하라고 백성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광야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1세대가 죽고, 이른바 모두가 ‘모태신앙’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말 것인지를 다시 선택하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도착한 이스라엘이 가진 문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광야의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그저 모태신앙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한 때가 이스라엘에게 곧 닥치리라는 것을 여호수아는 알았습니다.

 

그들이 마주한 가나안 땅은 그동안 광야에서만 하나님을 섬겨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초자연적인 공급을 항상 누려오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풍요 속에 살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장막 대신 이방신들의 화려한 성전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으로 ‘선택받은 백성 이스라엘’이었지만 그들은 선택해야 했습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섬기는 데 익숙한 이스라엘이었지만 그들은 새롭게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14절) 섬길 것인지 말 것인지를 분명히 선택해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여호수아의 고백을 살펴보면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하는 고백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절대주권의 하나님이 그의 백성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섬기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유의지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기로 선택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한 기쁨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대해 큰 오해를 하며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있다는 운명론적 관점이 가져오는 무기력함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도 ‘주도적인 의지’가 무엇인지 모른 채로 신앙생활을 하게끔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신앙생활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언젠가는 나도 변하겠지. 언젠가는 나도 뜨겁게 신앙생활 할 때가 있겠지.’ 하며 막연히 기다립니다. 다시 마음이 뜨거워지게 해달라고 날마다 기도할 수 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정작 본인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기로 선택하는 일을 자꾸 미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 중에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하나님을 섬기기로 스스로 확고하게 결단한 마음이 없기 때문에, 환경에 휩쓸리는 대로, 분위기에 휩쓸리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지금 하나님을 새롭게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 누가 뭐라 하든 하나님만을 찾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지옥에 가지 않으려고 하나님 믿는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사람의 신앙생활에는 차원이 다른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나도 사랑하기로, 내가 선택했다!’

 

이렇게 기쁨의 고백을 하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때 어떻게 사랑하실지 선택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대해 여러가지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에베소서는 ‘예정’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서신서입니다.

 

[엡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엡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엡3: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대해 믿는 사람이라면 모두 놀라워하고 감사해야 할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위 구절들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성경에서 ‘예정’이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의 약속이 동시에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미국의 부흥사 톰 브라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정은 언급될 때마다 긍정적인 것을 가리킬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가족으로 입양되도록 예정하셨다. 그분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도록 예정하셨다. 사람들이 지옥에 가거나 다른 끔찍한 일을 당하도록 예정되었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전혀 없다.”

 

이처럼 성경이 말씀하는 예정의 개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준비해두셨다는 것에 쓰이는 것이지, 어떤 사람은 천국 보내고 어떤 사람은 지옥 보내겠다는 의미로 사용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이러한 축복을 주실 것인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어 이렇게 놀랍도록 예정된 약속을 누리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은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자가 있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어주셨습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 또한 십자가를 스스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의 뜻 때문에 십자가에 ‘억지로’ 오르신 것이 아니라 ‘기꺼이’ 오르셔서 모든 것을 다 쏟아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다음 구절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마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이 말씀은 겟세마네에 계시던 예수님을 잡기 위해 검과 몽치를 든 무리들이 다가왔을 때 제자 중 하나가 칼을 빼 들고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르자 검을 도로 집어넣으라고 하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허세가 절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기도하면 당장이라도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들이 칼을 뽑아들고 예수님을 보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아버지 소원을 따라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셨지만, 예수님은 타의가 아닌 주도적인 의지를 가지고 십자가를 지기 원하셨습니다. 왜요? 그것이 저와 여러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이었으며,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한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감당하신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희생하기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놀라운 사랑 앞에 한없이 감사드리고 찬양드려야 할 줄 믿습니다!

 

 

(2편에서 계속)

 

선택하여 사랑하는 기쁨(2)(수24:14-15)

(1편에 이어서) 선택하여 사랑하는 기쁨(1)(수24:14-15) 여호수아 24장 14-15절 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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