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7장 26-29절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저희 집은 거실 베란다에서 보는 뷰가 참 좋습니다. 그런데 원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파트 바로 앞에 절이 하나 있는데 그 위에 커다란 황금색 불상이 하나 서 있는 것입니다. 이사하기 전에는 전혀 몰랐었는데 이사를 하고나니 그게 눈에 엄청 거슬렸습니다.
그런데 절이 있는 그 블럭이 재개발구역으로 잡혀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포크레인들이 들어와 아파트 맞은 편 구역에 있는 건물들을 철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사 오자마자 앞에서 매일 같이 소음도 나고 먼지도 나니 별로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저 포크레인들이 언젠가 저기 저 거슬리는 불상을 치워줄 것이라 생각하니 모든 게 다 용서가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구역이 꽤 넓은 구역인데 다른 건물들은 다 부수면서 절은 끝까지 남아있는 것입니다. 포크레인들이 매일같이 절 주변만 때려 부수고 절은 그대로 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마치 바알의 제단을 무너뜨리고 아세라의 우상을 찍어 부서버렸던 기드온이라도 된 것 같은 심정으로 매일 같이 그 불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결국 그 절 건물도 철거되었고 불상도 사라졌긴 했지만, 그것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우상을 무너뜨린다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니구나. 눈에 보이는 우상은 무너지기를 그토록 바라면서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쩌면 내 안에도 있을지 모르는 하나님보다 더 높아져 있는 우상들에 대해서도 내 마음이 이토록 타면서 회개를 촉구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이 들면서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은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설교했던 내용의 일부입니다.
아덴은 소위 서양 문명의 중심지라고 불리는 아테네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한 제국은 로마였지만, 그러한 로마조차도 그리스의 문화를 인정하고 계승 발전시키려고 했습니다. 라틴어가 상용언어로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층이나 상류층들은 일부러 헬라어를 즐겨 사용했고 심지어 신약성경도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아테네가 얼마나 큰 문화중심지였을지를 가늠해볼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조금 앞에 있는 16절을 보면 “바울이 아덴에서 동역자인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이 일어났다고 쓰고 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자신들의 철학과 종교에 대해 상당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보기에는 역겨운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덴에 머무는 동안 날마다 회당과 장터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 변론을 했다고 합니다. 아덴 사람들은 결국엔 바울을 붙들어 그 당시 아테네의 가장 중요한 법원이자 강연장이었던 ‘아레오바고’로 데려갔습니다. 소위 철학자의 도시라고 불리는 그곳에서, 당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그 아레오바고에서 사도 바울은 조금도 움츠러듬 없이 아덴 사람들을 향해 담대히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그 내용을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나누며 기도하려고 합니다.
1. 우리에게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No Limit’, ‘한계가 없다’는 말이나 ‘한계를 뛰어넘는다’ 같은 말에 매력을 느낍니다. 두근두근한 느낌이 들고, 멋진 성취감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 대해서 명백하게 말씀하십니다.
행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인간의 수명은 정해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해서 좀 오래 살고, 또 어떤 사람은 짧고 굵게 살다 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길어야 100년 남짓 살다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의 연대를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어느 시대에 태어나서, 그 시대 속에서 어떤 일들을 겪고, 또 그 시대를 얼마나 살지 하나님이 정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그 한계를 절대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거주의 경계도 한정하셨다고 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그곳에서 크게 벗어나 사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사람이 어느 지역에서 태어나 어떤 문화에서 살아가게 될지도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정하심을 따라 되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잘 발달한 시대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없는 곳이 별로 없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인간의 발길이 못 닫는 곳들이 존재합니다. 저 광대한 우주가 펼쳐져 있지만, 인간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은 여전히 지구라는 작은 별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 필요한 삶의 경계들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거주의 경계처럼, 사람이 이 땅을 딛고 살아가는 이상 넘어가면 안 되는 경계가 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지정해놓으신 삶의 경계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무너지고 있는 경계 중 하나는 분명 동성애의 문제일 것입니다.
목사님이라고 불리는 분들 중에도 버젓이 동성애를 옹호하고, 차별금지법 같은 악법을 내세우는 정당을 지지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시대가 변했으니 동성애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득합니다.
그들은 배도자입니다. 목사가 아닙니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기에 우리가 '진리'라 부르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왕상15:12
“남색(男色)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동성애를 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경계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허락해주신 삶의 경계를 벗어나는 일 중의 하나가 바로 동성애이고, 이것은 하나님께서도 용납하실 수 없어 그 사람을 그 거하는 땅에서 쫓아내실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26-27에서는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1:26-27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경계를 벗어나는 것이,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아무렇지 않게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스스로 그 잘못에 합당한 벌을 이미 받았다고 과거완료형의 시제를 사용하여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만, 괜찮다고, 시대가 그런 시대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가 흘러도 변함이 없고,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삶의 경계가 바뀐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신명기 22장 5절 말씀은 우리를 동성애로부터 더욱 경계시킵니다.
신명기 22:5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
여자는 여자답게 살고, 남자는 남자답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법칙이요, 사람이 지키고 살아야 할 삶의 경계입니다. 요즘 시대에는 여자가 남자 옷 입을 수 있고, 남자가 여자 옷을 입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게 뭐가 그리 심각한 문제냐고 반문할 사람들이 굉장히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이렇게 사소해 보이는 것도 사람들이 자주 넘어서게 되면 그 사소한 일들이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할 때는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부터 삶이 망가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인간을 창조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아시는 것입니다.
아시아에 살든, 유럽에 살든, 아프리카에 살든, 모든 인간 속에 이러한 타락의 본성이 동일하게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한 혈통을 타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행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태초에 지어진 인간, 아담과 하와가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 같았지만,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삶의 경계를 넘어가 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고,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정해놓으신 분명한 경계가 있었는데,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이 교만하게 하나님처럼 되기 위하여 그 경계를 넘어서 버렸던 것입니다.
열매 한 개 따먹은 게 뭐 그리 대수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경계를 넘어간 순간 그것은 단순히 열매 한 개를 훔쳐먹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했고, 하나님을 피해서 숨으려고 했으며, 아담은 자신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그 사랑하던 하와에게 모든 죄책을 떠넘기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된 것으로도 모자라 그토록 사랑하던 하와와의 관계도 파괴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혈통을 타고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항상 같은 문제를 겪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경계를 넘어서려는 사상들과 행위들이 인간 안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지독한 죄성이요, 인간의 한계인 것입니다.
시편 104편 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시104:9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 물의 경계를 정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가끔씩 폭우가 내리고, 쓰나미 같은 커다란 파도가 땅을 침범하는 것 같아보여도, 결국 물은 바다로 돌아가는데, 그것이 우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경계 때문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자연현상에도 실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하나님의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땅이 노아 시대 때 임했던 심판을 다시 당하지 않고 땅 위에서 모든 생물들이 무사히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가 지켜질 때에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한계에 대해서 바르게 인식해야 할 줄 믿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갖는 ‘유한성’이라는 것은 이 땅에서의 수명을 다할 때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대 앞에 서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각인시켜줍니다. 우리는 이 잠시 잠깐의 삶을 통해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넘치는 복락을 누리든지, 영원한 죽음과 끝없는 형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인간도 뛰어넘을 수 없는 명백한 한계입니다.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도 명백한 한계입니다. 언제 죽을지 안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안타까운 죽음들을 많이 겪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깨닫고 속히 회개해야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말씀 안에서, 그 생명과 진리의 빛 가운데에서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2.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시편 90편 12절에는 이러한 기도가 있습니다.
시90: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인간이 자신을 돌아보고, 나라는 존재가 이 땅 위에서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니라 유한한 존재이며, 그 살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하며, 인간으로서의 명백한 한계를 깨달아 알 때에, 그제서야 다른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위대한 창조자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며, 그분이 만드신 삶의 경계 안에 머물러야 안전할 수 있다는, 그 ‘한계성의 필요’를 깨달아 알 때에, 그제서야 인간은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행17:26-27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계를 주시고 경계를 주신 것은, 우리가 그 앞에서 좌절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낙심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나를 더듬어 찾으라고! 그것을 통해 나를 발견하라고!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이 창조한 수많은 것들이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들이 창조한 부와 명성이 영원할 것처럼 쫓아가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들은 곧 얼마 가지 않아 원래 없었던 것과 같이 되고 말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한성을 가진 인간이 창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새 차를 사고, 새 집을 산 경험이 있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열심히 돈을 모아서 새 차를 샀을 때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열심히 돈 모아서 겨우겨우 내 집을 장만했을 때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저는 아직 제 이름의 집을 사 본 적은 아직 없지만, 새 차를 샀을 때의 기분은 경험해 보았습니다. 제가 20대 때에는 내 명의로 새 차를 산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길을 걸어갈 때 도로를 지나가는 수많은 차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어떻게 수천만 원이나 하는 돈을 모아서 저렇게 차를 사서 타고 다닐까 늘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아, 다들 할부로 사는구나. 그래서 첫 아이가 생겼을 때 겁도 없이 3년 할부로 작은 차를 한 대 샀습니다. 앞으로 3년 동안 열심히 할부를 메워 넣어야 한다는 사실이 전혀 생각나지 않을 만큼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게 내 차구나! 셀프 세차장 끌고 가서 깨끗이 닦아주면서 애정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갔을까요? 지금은 그냥 무식하게 기계식 주차장에 잘 넣습니다. 세차비 몇 천원이 아까워서 자주 가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이 땅의 것이 줄 수 있는 기쁨이 참 별 것 없구나. 새 차를 가지면 매일 즐거울 줄 알았는데, 탈 때마다 기분이 좋아질 줄 알았는데, 이제는 그냥 그렇습니다.
여러분 중 집을 새로 장만하신 분들 중에, 요즘에도 집에 들어설 때마다 처음 이사할 때 느꼈던 그 기분 그대로를 느끼시는 분이 계십니까? ‘아니, 이게 우리집이라니!’하며 날마다 놀라시는 분 계십니까? 아마도 없으실 것입니다.
새로 스마트폰 구입하면 이쁜 케이스도 씌우고 애지중지하지만, 할부기간이 끝나갈 때 쯤이 되면 다음엔 어떤 모델로 바꿀까 생각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예쁜 옷을 매년 사는데 옷장을 열면 입을 옷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의 기쁨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부유해져도, 아무리 많은 명성을 가져도, 만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가질 때, 그 당시에는 기분이 좀 좋을지 몰라도, 잠시만 시간이 지나면 없는 것과 같아집니다. 그래서 돈을 더 많이 벌고, 더 많은 일을 하지만, 그러다가 결국 문득 속으로 이렇게 묻게 되는 것입니다.
‘엥? 이게 다야? 죽어라 열심히 일해서 돈 벌었는데, 명성을 얻었는데,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엥? 이게 다야?’
그 기쁨이 잠깐 있다가 안개처럼 사라져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이 많은 기업가가 자살하기도 하고, 유명한 연예인들도 이상한 일들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얻어도 만족이 안 되니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다스렸던 솔로몬왕은 아마도 이것을 역사상 가장 뼈저리게 경험해본 사람 중의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그의 경험을 전도서에다가 이렇게 기록해놓았습니다.
전2:4-11(새번역)
4 나는 여러 가지 큰 일을 성취하였다. 궁전도 지어 보고, 여러 곳에 포도원도 만들어 보았다.
5 나는 정원과 과수원을 만들고, 거기에 온갖 과일나무도 심어 보았다.
6 나무들이 자라나는 숲에 물을 대려고 여러 곳에 저수지도 만들어 보았다.
7 남녀 종들을 사들이기도 하고, 집에서 씨종들을 태어나게도 하였다. 나는 또한, 지금까지 예루살렘에 살던 어느 누구도 일찍이 그렇게 가져 본 적이 없을 만큼 많은 소와 양 같은 가축 떼를 가져 보았다.
8 은과 금, 임금들이 가지고 있던 여러 나라의 보물도 모아 보았으며, 남녀 가수들도 거느려 보았고, 남자들이 좋아하는 처첩도 많이 거느려 보았다.
9 드디어 나는 일찍이 예루살렘에 살던 어느 누구보다도 더 큰 세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지혜가 늘 내 곁에서 나를 깨우쳐 주었다.
10 원하던 것을 나는 다 얻었다. 누리고 싶은 낙은 무엇이든 삼가지 않았다. 나는 하는 일마다 다 자랑스러웠다. 이것은 내가 수고하여 얻은 나의 몫인 셈이었다.
11 그러나 내 손으로 성취한 모든 일과 이루려고 애쓴 나의 수고를 돌이켜보니, 참으로 세상 모든 것이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고, 아무런 보람도 없는 것이었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의 마지막 결론이 무엇입니까?
전12(새번역)
13 할 말은 다 하였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심판하신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든 은밀한 일을 다 심판하신다.”
이것이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사람 중 한 사람이었던 솔로몬의 결론입니다. 솔로몬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 세상의 모든 것들의 한계를 바라보며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너무 허무해서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통하여 인간의 한계 속에서 그대로 침몰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넘어 존재하는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고, 잠시 잠깐 지나가는 것들에 소망을 가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 속에서 산 소망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만물에 한계를 두신 이유도 바로 이렇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영원무궁한 것을 바라볼 때보다 본인의 한계와 주어진 환경의 한계들을 인식할 때 하나님을 더욱 깊이 찾습니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행복과 안정감 속에서는 하나님을 잘 찾지 않다가, 그 행복이 무너지면, 그 안정감이 깨뜨려질 때에 그제서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건강을 지켜주실 때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다가, 잃어버리는 순간이 와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가도를 달릴 때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다가, 사업이 엎어지고 위기가 닥치는 순간이 와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불행하게도 이게 인간의 본성이고, 하나님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꺼내놓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롬1:19-20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안 믿던 사람들도 급하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자신의 한계에 봉착해서 무너져 내릴 때, 대단하게 여겼던 자신의 존재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껴질 때, 여기서부터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단 한 가지도 없다고 느껴질 때, 그때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7절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행17: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동안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시기 때문에 찾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꼭 필요하게 되면 더듬어서라도 찾게 됩니다. 마치 맹인이 사방을 더듬어 필요한 물건을 찾는 것처럼, 우리는 다른 감각들을 동원해서 더듬고 더듬어서라도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불쌍한 인간의 모습이지만, 그러나 이렇게라도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이렇게라도 해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면 반드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감사할 만한 소식이 있습니다. 너무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그 소식이 오늘 본문 27절 하반절에 쓰여 있습니다.
행17:27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저에게서, 여러분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때에 금방 발견되어 주시기 위해 늘 가까이에 와서 계십니다. 발견해주기만을 기다리시면서 우리 곁에 함께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 좋으신 하나님을 항상 찾아내어 붙잡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한계가 발견될 때마다 세상 사람들처럼 낙담하고 절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한계를 만날 때마다 이 한계가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면 됩니다.
‘아, 이것은 내가 순간순간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고 있구나! 하나님을 잊지 말고 찾으라고 나에게 힌트를 주고 있구나!’
하나님을 찾으면 해결될 것입니다. 우리가 더듬어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 아버지의 따뜻한 손이 내 손을 꼬옥 잡아주실 것입니다. 그 사랑의 아버지 손을 꼬옥 붙잡고 담대히 걸어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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